| - 자기 앞의 생
- 국내도서
- 저자 : 에밀 아자르(Emile Ajar) / 용경식역
- 출판 : 문학동네 200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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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살 수 없어요."
절망독서를 읽고나서, 고전을 읽고 싶어졌다. 많이 들어본 서명이라 좋은 책이겠거니라는 생각에, 그리고 서명에 끌려 책을 빌리게 되었다. 이끌렸던 이유는, 자기 앞의 생이라는 것이 오롯이 본인이 감당해야할 삶이라는 뉘앙스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요새 삶은 내가 감당해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내 앞에 놓여진 나의 삶이라는 처절한 느낌이 나기도 하였다.)
소설을 좋아한다. 특히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을 유난히 더 좋아한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객관적인 사실만 늘어놓는 것보다는 주관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남의 생각을 엿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제 3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화자는 10살로 알고 자란 14살 아이 모하메드(모모)다. 화자가 아이인 소설도 좋아한다. 작가의 의도된 순수함을 보는 것이 좋고, 그 순수함이 잘 표현이 되면 귀여운 웃음이 나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대략,
로자아줌마가 있다. 로자 아줌마는 창녀들의 아이를 맡아 길러주는 일을 한다.모모는 로자아줌마가 맡아 길러주는 아이 중 하나이다. 돈은 꼬박꼬박 오지만 모모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모모는 예쁘고 잘생겼고 남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관심을 받고 싶은 10살 아이이다. 그래서 일부러 도둑질을 하고 일부러 들키고는 한다.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로자아줌마와 모모는 서로를 의지한다. 욕을하고 끔찍해하면서도.그러던 로자아줌마는 뇌혈증에 걸리게 되어 자주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점점 미쳐가고 죽어간다. 뇌혈증에 걸린 로자아줌마를 카츠라는 이름의 의사는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하지만 로자아줌마와 모모는 병원에서 죽지도 못하고 숨만 붙어있는 상태를 끔찍히 여긴다(죽어가는 것을 겨우 다시 살려내는 것을, 숨만 붙어있는 상태를). 모모는 아줌마의 친척들이 아줌마를 이스라엘로 데려가려 한다고, 그래서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의사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몰래 로자 아줌마를 지하실로 옮긴다.로자아줌마는 지하실에서 죽는다. 모모는 창백해져가는 아줌마의 얼굴에 화장을 시킨다. 냄새가 나면 향수를 뿌린다.향수가 냄새를 덮지 못하면 밖에 나가서 향수를 훔쳐와서 다시 향수를 쏟아 붓는다. 얼굴에 화장을 시킨다. 그러다 이웃의 신고로 들킨다. 끔찍한 일이라며 시체를 옮기는 사람들을 보며 모모는 생각했나? 말하기를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살 수 없어요.
어느 한 창녀의 버려진 아이인 모모. 관심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쁜 행동을 하고 누군가의 눈에 띄도록 일부러 기다리고, 맞으며 아우성치는 아이가 불쌍했다. 모모의 시니컬함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고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자조적인 웃음을 띄는 느낌이랄까.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우정 또한 안쓰러웠다. 서로를 제외하고 의지할 곳 없어, 사랑할 사람없어 서로를 꼭 끌어안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시체에 화장을 시키고 향수를 뿌리고 다시 창백해지면 화장을 시키고 냄새가나면 향수를 뿌리는 그 과정은 너무 슬펐다.
수용소에 갔다와서 일평생 트라우마를 겪는 로자아줌마에게 뭐가 두렵냐며 묻자 “무서워 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라는 로자아줌마의 말도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빅토르위고의 책을 소중히 여기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들 또한..
재밌고, 안쓰럽고, 찡한 책이었다.
책의 내용도 슬프고 재미있었지만, 작가또한 재미있었다. 에밀 아자르는 사실 에밀 아자르가 아니라 ‘로망 가리’ 라는 작가이다.
그는 이미 여러차례 상을 수상한 작가인데, 수상 이후로 내는 소설 마다 비평가들의 비난을 받는다. 그러던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내고 원칙적으로 한 사람이 단 한번만 받아야 하는 상을 또 받게 된다. 책의 마지막에 자신이 사실 로망가리임을 밝히며 쓴 이야기에 킥킥대며 장난기가 묻어있는 느낌이었다. '힝~ 속았지!' 하는. 그러면서 로망가리로 또 책을 내는데 그건 여전히 비판 투성이다. 로망가리는 자살했다.
내 작품이 오롯이 내 작품으로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평가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건 괴로웠을 것 같다.
아래는 내가 읽으면서 좋았던 구절들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의 눈에 띄도록 일부러 기다렸다. 주인이 나와서 따귀를 한 대 갈기면 나는 아우성을 치며 울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셈이었다.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 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떄문이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마약 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떄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 쓴다.
그 구경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들 모두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기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받지 않으며 늙지도 않고 불행에 빠지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며 어느 집 대문 아래 앉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늙었으므로 걸음걸이가 너무 느렸다.